[시사뉴스 유한태 기자] 한미 정상회담으로 북핵문제 해결이 계기를 마련해 보려던 문재인 정부의 중재외교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우리 정부의 특사 파견 및 한미정상회담 제의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아 도돌이표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가시적 성과 없었던 한미정상회담
지난 11일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은 공동성명이나 기자회견이 없었다. 또한 일치된 의견보다는 오히려 이견을 노출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는 ‘태극기 논란’이 더 주목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을 통해 "제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도 더 큰 합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며 "중요한 것은 대화의 모멘텀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고, 가까운 시일 내에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라는 전망을 세계에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점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해서 김 위원장에게 신뢰를 표명해주고, 북한이 대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주신 데 높이 평가하고 감사드린다"며 "한국은 미국과 함께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의 최종적 상태, 그 비핵화 목적에 대해 완벽하게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고, 빛 샐 틈 없는 공조로 완전한 비핵화가 끝날 때까지 공조할 것이라고 약속 드린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보다 더 좋은 관계다. 앞으로도 계속 대화하기를 바란다"며 "문 대통령과 북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이고, 북한과의 추가 회담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라고 발언으로 원론적인 화답을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으로 인한 북미대화 교착 상황에서 어려움을 무릅썼다는 데 의의를 뒀다. 그러나 대북정책에 있어 미국의 기존 입장을 충분히 변화시키진 못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오바마 행정부 국무부 한일담당관을 지냈던 민타로 오바는 NK뉴스에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유난히 어려운 도전을 했다"며 "외교 절차를 정상궤도로 되돌리도록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다시 대북외교에 끌어들여야 했다"고 평가했다.
북한문제 싱크탱크 스팀슨센터 데이비드 김 연구분석관은 "빅딜을 밀어붙이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단계적 접근을 원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및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의 갈등이 미국 행정부 내부에 남아있다"고 어려웠던 이번 회담 여건에 시선을 뒀다.
이처럼 어려웠던 여건으로 인해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는 애초부터 어려웠다는 분석도 나왔다. 오바 전 담당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 긍정적인 생각을 내비치긴 했다"면서도 "문 대통령이 미국의 완강한 입장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는 명확한 조짐은 거의 없다"고 했다.
김 분석관도 "두 정상이 북한 문제와 관련해 그다지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비핵화를 우선순위에 둔 미국의 입장을 더 큰 평화라는 의제의 한 부분에 비핵화를 포함시킨다는 문 대통령 전략으로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담당 조정관은 미국의소리(VOA)에 "문 대통령은 비핵화 협상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도록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시키는 데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식 접근법을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도돌이표 되는 북한
반면 북한의 반응도 신통치 않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 이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도 보여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중재자'나 '촉진자'가 아닌 '민족 이익 당사자'로 나설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 2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3일 밝혔다.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협력사업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강도 높게 드러낸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로 말미암아 북남관계 개선의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는가, 아니면 전쟁의 위험이 짙어가는 속에 파국에로 치닫던 과거로 되돌아가는가 하는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2기 체제 출범을 계기로 연일 군사행보를 보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6일 항공 및 반항공군 제1017군부대를 찾아 비행훈련을 지도한 데 이어, 다음날인 17일에는 신형 전술유도무기 사격시험을 지도했다.
여기에 더해 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답변이 없는 채 북러 정상회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오는 24일께 러시아를 방문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7일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계획을 기정사실로 한 데 이어, 크렘린궁은 18일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4월 하순께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관련해 주요 외신은 오는 24~26일 러시아를 방문할 거라는 전망을 내고 있다.
북한은 올해까지 미국과의 협상 판을 깨지는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하게 밝혔으나, 한편으로는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는 '용단'을 보이지 않는다면 협상에 나서지 않을 거라는 입장도 확실히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 1월 김 위원장과의 4차 북중 정상회담에서 "조선 측이 주장하는 원칙적인 문제들은 응당한 요구"라며 단계적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지지 의사를 확인하며 대미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소련 연방이 해체될 때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의 비핵화를 이끈 경험도 있어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이행에 기술적으로 개입할 경우 미국은 대북 협상력 약화를 우려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악화되는 국내 여론
한미정상회담이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던 점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오지랖’ 발언으로 자유한국당의 혹평이 힘을 얻고 있는 모양새다.
황교안 대표는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입장문을 내고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쉬운 회담"이라며 "단독회담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공동성명이나 기자회견조차 없었다. 양과 질 모두 부실한 회담 결과"라고 혹평했다.
이어 "무엇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견을 노출했다는 점에서 한미 간 긴밀한 공조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매우 우려스럽다"며 "북한 비핵화 전망이 오히려 더 어두워진 것 같아서 큰 걱정"이라고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도 원내대책회의에서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정상회담이었다. 왜 갔는지 모를 정도의 정체불명 정상회담이었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며 "문재인 정권의 아마추어 외교 참사"라고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거래)을 미국에서 용인해줄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는 다르다"며 "북한만 바라보며 또다시 평화와 대화를 추진한다는 외교안보의 민낯이 드러났다. 앞으로 북한과 어떤 쪽으로 흐르게 될지 지켜보겠다"고 엄포를 놨다.
5~6월 남·북·미 3자회담이 북핵 실마리?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오는 5~6월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며, 이 시기에 북한이 선제적 조치를 취한다면 남·북·미 3자 회담도 가능할 거라고 전망했다. 즉 이 자리에서 북핵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 특보는 18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제2회 뉴시스 통일경제포럼'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트럼프 대통령이 5월 하순, 6월 하순에 일본을 방문한다. 그때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이뤄지고, 북한이 선제적으로 조치한다면 남·북·미 3자 정상회담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현재의 교착 국면을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하노이(2차 북미 정상회담)는 실패라고 보지 않는다. 차이점을 본 것"이라며 "트럼프와 김정은은 90%를 합의했지만 10% (합의를) 못 본 상황에서 90%로 가려고 했지만 북한이 관련해서 문서를 달라고 하자 트럼프가 '나에 대한 신뢰'를 가지면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고, 볼튼 보좌관이 서류를 해줄 수 없다고 해서 판이 깨졌다(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미국이 모두 양보하고 한국은 양자의 양보에 공통점 같은 최대 공약수를 만들어 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며 "올해는 우리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시기다. 특히 5월 6월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결과적으로 북미 관계는 종전선언을 타진했었던 1차 북미 정상회담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북미 비핵화 협상의 지렛대로 여전히 종전선언이 유효하게 된 셈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 15일 수보회의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정세 분석 위에서 이뤄진 것으로 풀이된다. 또 김 위원장이 연내로 비핵화 협상 시한을 못박은만큼 한미-남북-북미 각각 양자회담을 반복하고 그 결과를 서로 공유하는 절차적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한 목적도 담겨 있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문 대통령이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언급한 것은 2가지 측면을 고려한 것일 수 있다"며 "첫째는 남북-한미-북미 양자 정상회담을 거치며 각각의 결과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비판의 소지를 줄이고자 하는 목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둘째는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서 버려진 카드로 여겨졌던 남북미 3자 종전선언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도 함께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관측했다.
그러면서 "북미 비핵화 협상판을 '센토사 합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종전선언 카드는 교착상태에 놓인 북미 간 현재의 상황을 뚫을 수 있는 레버리지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