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베스트셀러는 당대 대중 마음의 척도다. 시대적 풍속과 정서, 사회상이 온전히 담겨 있는 것이다. 책을 고르는 행위는 개인 욕망의 반영이며, 베스트셀러는 집단 열망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힐링’이 필요해, 불안사회 위로
인터넷서점 예스24는 올 한 해 출판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혜민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아들러 심리학 대표 도서인 ‘미움받을 용기’가 선정됐다.
힐링 코드는 지난 10여년 간 출판계에서 가장 흥행한 키워드다. 예스24의 집계를 기준으로 2007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 판매된 에세이 분야의 누적순위를 분석한 결과 2012년 출간된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출간된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2위다.
경기불황과 가치관의 붕괴로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대중에게 마음의 위로는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과거에도 불황기에 마음을 위로하는 서적의 유행은 있었지만 최근의 베스트셀러는 타인에게서 위안을 찾거나 희망을 발견하려하기보다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기 내면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은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독자를 위로한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도 따스한 시선을 던진다. 역대 최장기 베스트셀러인 ‘미움받을 용기’ 또한 타인의 기대에 부흥하려고 노력하면서 불행하지 말고 나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자유를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의 이론을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재조명한 이 책은 아시아 특유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해법을 담고 있다.
90년대 감성적 일화집 유행
불황기에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독서는 과거에도 있어온 패턴이다. IMF 사태로 힘겨운 현실에서 1996년 출간된 잭 캔필드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1996년 8월에 출간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등이 베스트셀러였다. 이 두 책은 1990년대 누적 베스트셀러로도 1, 2위를 기록했다.
일상의 소소한 미담을 엮어낸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는 어려움 속에서 빛나는 희망 사랑 용기 같은 가치들을 일깨워주는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돼 이 같은 구성 서적의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영혼의 닭고기 스프’ ‘선과 악에 관한 35가지 이야기’ ‘20대에 해야 할 50가지 이야기’ 같은 감성적인 일화집이 유행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40대 후반 중년 가장의 애틋한 가족 사랑을 담은 소설 ‘아버지’는 IMF로 실직한 가장에 대한 집단 감수성이 인기의 배경이 됐다. ‘울고 싶을 때 빰을 때려주는’ 신파적 정서와 시대의 우울한 초상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잘 부각시킨 것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소설 ‘아버지’의 열풍과 비교되곤 한다. 교보문고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자사 소설 누적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지난 2008년 출판된 ‘엄마를 부탁해’가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조사됐다. 소설 ‘아버지’가 IMF를 맞아 산업역군이었던 아버지의 추락에 함께 슬퍼했다면, ‘엄마를 부탁해’는 금융위기의 각박한 현실에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집단 정서를 자극했다.
주가 상승기, 재테크 서적 인기
주가 상승기를 거쳐 부에 대한 욕망이 정점에 달했던 2007년 초에는 재테크 서적이 열풍을 불었다. 몇 년간 성장을 거듭하며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사람이 많았다. 80년대 경제 호황기에는 출세 처세 증권 부동산 등의 돈벌이와 성공한 자들의 수기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교보문고가 2000년대 누적 판매율 1위로 발표한 자기계발서 ‘시크릿’은 호주의 전직 TV 프로듀서인 론다 번이 ‘부와 성공’의 비밀을 파헤친 책이다. 출간 당시부터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홍보의 승리’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크릿’이 2년 연속으로 1위에 올랐던 2007, 2008년은 금융위기를 실감하기 직전, 성공에 대한 가능성과 열풍의 분위기가 존재하던 시대였다. ‘성공’보다는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메시지가 더 인기를 끌고 있는 현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작년에는 한국사 열풍이 서점가에 불기도 했다. 교보문고는 작년 한국사 분야의 판매 데이터 분석 결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설민석 등 스타 저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풀어낸 책들이 인기를 모은 결과였다.
이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비롯한 역사 이슈의 대두와 계층간의 갈등 및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근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결과로 분석된다. 2017학년도 대입 수능시험에서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채택된 영향도 짐작할 수 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새로운 입시제도로 결정됐던 1993년에는 위기철의 ‘반갑다 논리야’ 같은 논리서가 한 해를 휩쓸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대입시험 대상자가 아니라도 학부모까지 입시 관련 분야 서적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도서평론가 정석희씨는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독자들이 만드는 것이지 출판계가 상업적으로 요구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베스트셀러가 시대적 감수성을 담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