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H5N6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의 전국 확산으로 계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AI 창궐로 산란계(알 낳는 닭)가 30% 이상 떼죽음을 당하면서 한 달 전 5000원대 였던 계란 한판의 가격이 1만원대를 넘어섰지만 이마저도 물량이 부족해 구하기 힘들 정도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부터 전국적으로 이뤄진 가금류 살처분에 따라 알을 낳는 산란계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어 계란 가격이 이미 급등한 상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지난 1일 발표한 특란(중품) 30개 한 판 가격이 8237원으로, AI 최초신고날인 지난해 11월16일 5678원 보다 47% 올랐다. 이는 aT가 계란값 집계를 시작한 1996년 이래 처음이다.
계란값이 치솟으면서 치킨집과 삼계탕집은 물론 계란을 재료로 하는 제과점이나 부침개 판매점 등은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물가도 덩달아 들썩이면서 서민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정기간 산지와 계약을 맺고 계란을 공급해 온 대기업 식품업체들도 제품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판매 중단에 이어 가격인상까지도 검토 중이다.
제과업계 관계자는 "제과 제품에 계란 사용이 많아 매일 AI사태 및 계란 수급량 등에 대해 면밀히 체크하고 있다"며 "AI 사태 장기화로 원료 수급이 불안정하게 되면 원가 압박, 생산 감소 및 중단 등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입 계란, 식탁에 오른다
계란값이 치솟자 수급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치솟는 계란값을 잡기 위해 신선란과 계란 가공품에 붙던 관세를 올해 6월까지 일시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이번 할당관세 시행으로 8~30%의 관세를 부담하던 신선란, 계란액, 계란가루 등 8개 품목(9만8000t)을 지난 4일부터 무관세로 수입할 수 있게 됐다.
원활한 수입 지원을 위해 미국산 신선란 수입 시 필수요건인 해외 수출작업장 등록 신청 절차도 간소화하기로 했다. 가능한 한 당일 처리할 예정이다. 정부는 수입 시 수출국 정부로부터 발급받아야 하는 검역·위생증명서 서식과 관련해 미국 정부 등 수출국과 협의 중이다. 또한 항공운송은 운송비의 50%를 1t 당 100만원 한도 내에서, 해상운송은 운송비의 50%를 9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할 계획이다.
신속한 수입 진행을 위해 검역은 1~3일 내, 검사는 18일에서 8일로 줄이는 등 관련 절차를 단축할 계획이다. 검역·검사가 완료되면 즉시 통관하기로 했다. 신선란의 대체제인 전란액 수입이 늘어날 수 있도록 수입대상국도 확대할 방침이다. 현재 식약처가 지정한 수입 가능 국가는 말레이시아, 인도, 캐나다, 중국 등 4곳이다.
식용 신선란 수입사례가 전무했던 만큼 정보를 얻기 어려운 수입업체를 위해 aT가 계란수입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다. 6일부터 aT 홈페이지에 팝업창을 띄워 시장정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계란값 인상에 편승해 다른 가공식품 가격을 부당하게 인상하지 않도록 소비자단체를 통해 감시를 강화하고 사재기 등 유통실태 합동점검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계란의 안정적 공급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입 계란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최대 20일이 걸리던 수입 절차를 일주일로 단축하기로 했지만, 아직 수입 허가 신청을 한 업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입 계란 가격은 한 판에 9000원 정도로 예상된다.
계란값 폭등, 농가·유통상 폭리 책임 공방
AI 확산으로 계란값 이상급등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사재기'와 '매점매석'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계란값 급등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통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계란이 농가에서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는 크게 3~4단계를 거친다. 일단 농가에서 생산된 계란은 수집판매업자를 통해 세척 및 포장 과정에 들어간다. 최근에는 생산 농가들이 조합을 이뤄 수집판매업까지 겸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후 계란은 대형마트를 비롯한 소매점으로 유통돼 소비자에게 판매되는데, 도매과정이 생략되기도 한다.
이처럼 계란의 유통과정에서 중간 마진이 붙는 만큼, 일각에서는 추가적인 가격 상승을 기다리는 일부 도매상들의 매점매석과 공급 농가의 출하량 조절이 현 상황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부 대형 도매상이 물량을 묶어놓는 식으로 수급을 조절하거나 이윤을 무리하게 남기면서 가격이 더 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도매상들은 오히려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폭등하는 계란 가격에 요즘 하루하루가 절망스럽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기도에서 계란 도매업을 하는 최모(45·여)씨는 "물건이 없어서 장사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대기업이나 상인들에게만 물건을 빼주고 있다. 서울 쪽은 도매업 절반이 문 닫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한 공급 농가에서 계란을 풀지 않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최씨는 "언론에 도매업자들이 가격을 조정하고 있다고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농장에서 '갑질'을 하고 있다. 지금은 고시가격 자체가 아예 무너져서 농장에서 달라는 대로 줘야하는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소매업자 관계자는 "주거래처인 도매업도 산지에서 계란을 공급받지 못해 도산됐다고 해서 다른 거래처와 연결해서 수급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는 방역 골든타임을 놓친 정부의 초동방역 실패가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정부는 AI발생 한 달이 지나서야 범정부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여는 등 안이한 대응을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는 AI발생 한 달 만에야 위기경보를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올리면서도 살아있는 닭 유통을 허용하고 이틀 만에 이를 금지하는 등 오락가락 행정의 전형을 보였다. 이에 일각에서는 또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 정부가 보다 실효성 있는 방역체계 구축과 계란 유통 구조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