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지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경북 경주에서 9월12일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지진을 관측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강력한 수준이다.
400여 차례의 여진도 동반됐다. 이후 불과 일주일 만인 19일에는 진도 4.5의 비교적 강한 지진이 비슷한 시각에 다시 일어나 주민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앙지인 경주뿐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들도 언제 더 큰 강진이 덮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떨고 있다.
그러나 국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이번 지진 사태로 불신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정치권은 매뉴얼도, 골든타임도, 사후대책도 없는 '3무(無)대책'이라며 정부를 질책하고 나섰다. 특히 재난 컨트롤타워인 국민안전처는 미숙한 대응을 반복해 무능함을 드러냈다. 세월호에서도, 이번 지진사태에서도 여전히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지켜 줄 정부는 없었다.
지진에 무방비 노출된 한반도
내진설계 부실
우리나라는 그간 사실상 지진 안전지대라는 인식 속에 내진설계에 대한 구체적 강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설계 단계에서 지진 하중을 고려하는 내진설계 의무 규정은 1988년이 돼서야 처음 도입됐다. 이후 적용대상을 소규모 건축물까지 지속적으로 확대했고, 2008년 '지진재해대책법' 제정을 계기로 기존 시설에 대한 내진보강을 시작했다. 현재는 3층 이상, 면적 500㎡, 높이 13m 이상인 건물은 의무적으로 내진설계를 해야 한다. 이는 규모 6.0 이상의 지진에 견딜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내진설계가 의무화된 1988년 이전에 지어진 고층빌딩이나 아파트들은 지진 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게다가 도심 밀집지역 중심으로 고층 아파트 주거가 많아 피해는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특히 국내 건축물 중 내진설계가 적용된 건물의 비율이 30%대에 그치는 것으로 드러나 국민들의 우려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국토부로부터 받은 전국 지자체별 내진설계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 건축물 698만6913동 중 내진확보가 된 건축물은 47만5335동으로 6.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건축법 시행령에 따른 내진설계 대상 건축물도 143만9549동 중 47만5335동만 내진확보가 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 내진율은 33%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내진율은 83%가 넘지만 중소규모 건축물가운데 내진설계가 반영된 건물은 극소수로 밝혀졌다.
전국 지자체별 내진설계 현황을 살펴보면 내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세종(50.8%), 울산(41%), 경남(40.8%)으로 집계됐다. 내진율이 가장 저조한 곳은 부산(25.8%), 대구(27.2%), 서울(27.2%)순이었다. 공공건축물 내진율도 17.27%에 불과하다. △원자력시설(100%) △댐(100%) △도시철도(79.7%) 등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병원(82.2%) △소방서(38.6%) △학교(22.6%) 등 공공건축물의 내진율은 20.7%에 불과했다.
이에 더 큰 지진으로 인한 대형 인명참사를 막을 수 있도록 조속한 내진보강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안전처, '컨트롤' 없고 '타워'만 있다
전례없는 대형 지진으로 한반도 전역이 공포에 빠졌지만 국민안전처의 무능한 대처와 재난 컨트롤타워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전처는 세월호 등 여러 사건을 통해 탄생한 정부의 재난 컨트롤타워다. 다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안전처가 정작 지진 앞에서 미숙한 대응을 반복해 신뢰를 잃고 있다.
19일 경주에서 규모 4.5의 강한 여진이 발생한 뒤 안전처 홈페이지는 또다시 2시간가량 '먹통'이 됐다. 일주일 전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도 안전처 홈페이지는 3시간 넘게 접속이 되지 않았다. 안전처는 정부종합전산센터가 홈페이지 처리용량을 클라우드 기술을 적용해 최대 80배까지 향상시켰다고 밝혔지만, 또다시 홈페이지가 다운되면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긴급재난문자도 여진이 강타한 경주 지역엔 발생 5분 뒤와 8분 뒤 등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전달됐고 대부분의 주민이 지진동(動)을 분명하게 느꼈던 부산·울산·대구·경남 등 인근 지역엔 14분 뒤에야 도착했다. 긴급재해 상황이 벌어질 때 재난안전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안전처의 뒷북 재난문자와 늑장대응이 불과 일주일 만에 되풀이 된 셈이다.
안전처의 대응 매뉴얼도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 매뉴얼 상에 재난문자 시안에는 지진규모에 부합하는 세부적인 행동지침이 담겨있지 않아 대형지진 발생 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피가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매뉴얼에 명시한 지진 대피 요령도 시대 흐름과 뒤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지진이 발생하면 실내 탁자 밑으로 몸을 피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는 탁자 보다는 창문이나 유리처럼 상대적으로 깨질 물건이 적은 화장실로 대피할 것을 권하고 있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매뉴얼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진이 발생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른다"며 "긴급재난문자에 지진 대피요령을 간략하게 넣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대피문자에 대피 지역이나 학교 등 장소까지 상세하게 제공한다"고 말했다.
또한 안전처는 지진 방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인 '활성단층 지도' 조차 파악하지 않는 등 지진 대비에 손 놓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안전처는 지난 2009년 예산 20억원을 들여 활성단층 지도 및 지진위험 지도 제작·발간 프로젝트를 지질자원연구원에 지원했다. 이 프로젝트는 단층의 특성과 재발 주기 등을 파악해 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안전처는 2012년 보고서 결과를 발표하려 했지만 졸속이라는 전문가들의 반발로 공개 불가 결정이 내려지자, 자진 폐기 후 이를 감춰온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남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는 최소 20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3~4년 안에 결론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제시했지만, 안전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진과 관련한 안전처의 늑장대응 논란이 올해에만 네 번째나 제기되자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안전처의 존립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안전처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