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9월16일)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자질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세종은 장영실의 남다른 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가까이하였다. 결국 노비였던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앉히고 면천시키는 세종. 이어 정5품 사직, 정4품 호군, 그리고 종3품 대호군에 이르기까지 거듭되는 장영실의 파격 승진. 노비였던 장영실이 받은 상의원 별좌직은 더 높은 품계의 다른 직첩보다 훨씬 거센 신료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세종은 장영실을 면천시킨 후 온갖 일을 시키며 곁에 두었다. 청옥을 채굴하게 하더니, 어느 날은 물시계를 만들게 하고, 또 어느 날은 금속을 합금하게 한다. 또한 비밀리에 진행되던 세종의 천문 관측사업에 참여하여 혼천의, 간의 등도 제작하며 장영실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된다. 조선만의 시간을 갖고자 한 세종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바친 장영실의 업무량은 ‘세종의 전속 노비’라 할 만큼 많았다.
1442년 장영실은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다. 세종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시험으로 운행하던 중에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 이 일을 담당했던 장영실은 불경죄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이후 완전히 기록에서 사라진다. 오늘날에도 완벽히 복원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한 장본인이 가마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문스럽기만 하다. 또한 실제로 장영실은 가마의 안전성에 대해 경고를 했고, 이를 묵인한 것은 다른 감독관이었던 조순생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장영실을 아꼈던 세종은 왜 이런 불공평한 처벌을 내린 것일까.
28일 밤 10시3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의 ‘세종, 장영실을 버리다’ 편에서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