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 칼럼】 멸공을 말한다.

2022.01.22 00:41:18


[시사뉴스 강영환 칼럼니스트] 몇 년 전 일이다. 보수주의 운동을 하는 선배들과 얼큰히 술을 한 잔 하고는 2차로 노래방을 갔다. 돌아가며 트로트에, 7080노래가 연이어지는 속에 성악가 뺨치는 교회성가대 출신의 선배가 마이크를 잡았다. 같이 몇 번 노래방을 다닌 적이 있는지라 정지용작 <향수>를 청한다. 박인수, 이동원이 함께 부르듯 선배는 목청을 달리해서 완벽히 노래를 마친다. 앵콜이 쏟아진다.


멋쩍은 듯한 표정이지만 이내 번호판을 누르고 마이크를 다시 든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로 시작되는 <멸공의 횃불>이다. 다들 재미있다는 듯 박수치며, 일어서서 반동을 하며 따라 부른다.

 


군대 생활 후 거의 30년 만에 부른 터라 나도 따라하지만 술이 얼큰한 상태에서도 생각이 복잡해진다. ‘분위기 깨게 왠 멸공의 횃불’ ‘흥겨운 노래방에서 굳이..’의 부정에, ‘그래! 추억의 노래니까 인정’의 긍정까지.

 

그런데 사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으로 시작되는 <광야에서>또한 비슷한 심경으로 노래방에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오랜만에 듣고 따라부르는 멸공의 노래가 역시 그리 달갑지 않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그 잔상이 남는다. 곰곰 생각하다가도 그런데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멸공이 장안에 화제다. 멸공은 올해 초 팔로워 73만 명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을 테다 #멸공!”이라고 올린 게시물을 인스타그램 측이 삭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정 부회장이 항의하자, 인스타그램은 “시스템 오류”라는 해명과 함께 해당 글을 복구했다.

 


이후 멸공논란은 정 부회장의 반격과 팔로워들의 엄호, 그리고 다른 인풀루엔저의 설전으로 확전되었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자를 멸한다는 뜻이다. 이 두 자의 단어는 장안을 멸공정국으로 만들어버렸다.


멸공은 사실 중국에서의 사업전개에 문제점을 체험한 정 부회장의 공산당 집권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그의 트렌디한 감각이 결합한 깜짝 아이디어에 가까웠다. 사업하는 사람이 ‘멸공’이라는 다소 이념에 바탕한 도발적 단어를 쓰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는데, 2030세대는 이를 하나의 재미있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다소의 이념적 태클이 있었지만 정 부회장의 글에는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등의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그런데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은 사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다. 조 전 장관은 정용진의 멸공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상기된다고 정치와 연결시켰다. 이에 질세라 윤석열 후보는 정 부회장을 응원하듯 이마트에서 장 보며, 달걀, 파, 멸치, 콩 구매 인증샷과 함께 ‘문파멸콩’으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 성격으로 확전시켰다.

 

나경원 전 의원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인증샷이 이어져 정치의 영역으로 전선이 펼쳐지면서 상대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구태적 이념공세라고 맞불을 놓았다. 그리고는 멸공의 불똥은 이마트 등 신세계백화점과 계열사인 스타벅스로 튀어, 불매운동이 조심스레 확산되었다.

 

마치 한·일 갈등 속의 일본계 회사라 알려진 유니클로 보이콧 운동을 연상할 정도로 사회는 <보이콧 정용진 vs 바이콧 정용진>으로 갈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사태확산을 우려한 정 부회장은 사과를 하고 멸공전선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다시 멸공세상은 어느 정도 수면 아래로 안정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의 언어는 나만의 쇼(Show)다”라는 말이 있다. 프레드 쉐피시 감독이 제작한 러브앤아트(원제 Words &Pictures)영화의 한 대사이다. 정용진 부회장의 언어엔 그만의 쇼가 있었다. 그 쇼를 2030세대는 단순한 쇼로 받아들였지만 기성세대와 기존질서는 고정관념으로 해석하려 들었다. 친중이냐 반중이냐로 의미를 부여하였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를 넘은 멸망까지의 과격한 이념언어로 치부했다.

 

게다가 한일전 대하듯 양극화의 논리로 밀어붙여 2030의 삶의 일부까지 되어버린 스타벅스에 대한 찬반운동까지 불러왔다.


영화대사처럼 “언어도 결국 이미지(Image)”일 수 있다. 멸공에의 열광은 이념이라는 고리타분한 논리가 아니라, 스타벅스 불매의 선동적 궤변이 아니라 2030의 순간적 느낌, 다소 격한 표현, 그리고 키다리아저씨의 통쾌한 한마디에 대한 공감이 담겨있다. 언어에 담긴 쇼를 즐겨라. 더 이상의 해설은 거두어라. 요즘 애들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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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bridge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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